몸을 담궜던 풀장에서 빠져나온다. 찰박이는 소리는 환청처럼 귓가에서 여려지고 사라진다.
싫다. 수영이 끔찍하리만치 싫다. 이번에야먈로 고해신이 내린 결론이었다. 차가운 물이 온 피부에 닿는 것이 싫다. 이 창백한 온기가 전유되면 처량함마저 느껴진다. 갗에 맞닿아 오는 한기는 자신의 사정은 봐 주지도 않는 듯하다. 온 몸에 이를 미리 예행해 두어도 시렵기는 마찬가지다, 견딜 수 있었던 이 냉기가 어느 날부터는 감내하고 싶지 않아졌다. 시려움에 염증이 인다. 더 이상 이는 한기를 인내하고 싶지 않다.
하강이 싫다. 수영장 안에 들어설 때 몸의 간격을 좁혀 하는 다이빙이 싫다. 자신이 하강하지 않으면 동요하지 않는,
파도조차 없는 죽은 풀장의 물이 싫다. 온 힘을 다 해 수면에 부딪혀 봐야, 수심을 가늠할 새도 없이 가라앉는 자신이 있다.
물은 작용하지 않는 모든 대상을 가라앉힌다. 숨을 끊어 놓는다.
그러니 싫다. 더 이상의 고려는 끝났다. 더는 수영할 수 없다.
졸업까지는 한 해가 넘게 남았다.
체고의 2학년이란 신분은, 그때까지 자신을 수영부 소속으로 묶어 둘 것이다.
마음대로 하라지, 졸업 때까지 이 곳에 들리는 일은 이제 없을 거야.
여전히 시려운 물방울들이 유독 흰 피부에 매달려 달랑거린다. 결이 고운 밀발의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떨어진다.
잘생긴 콧잔등에 몇 방울이 튀어 찬찬히 떨어져 내린다.
시선을 의식하고 바라보면 풀장 맞은 편, 상처투성이 얼굴을 한 검은 머리칼의 동급생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자신이 수영장에 방문할 때마다, 언제나 의자에 앉아 자신을 살피는 그 애 이름은 이감찬이다. 시선에는 날이 서 있다. 꼭 무언가를 묻고 싶은 것처럼.
같은 수영부에다가 동갑, 꽤 여러번 대화를 나눈 적도 있다. 하지만 따로 용건을 만들 만큼 가까운 사이는 결코 아닌데, 그런데도 이감찬은 수영장에 방문할 때마다 그를 쳐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이유는 매번 궁금하다. 먼저 물어볼까, 그런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매사 거북스런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위해 털어내려 애쓰다 보니, 답을 들을 기회가 영 없다.
이제 수영장에는 안 올 텐데, 찜찜했는데 제법 아쉽다.
고해신은 알지 못한다. 그가 오늘 깨달은 것이라곤, 앞으로 자신은 더 이상 수영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 뿐이다.
수영장 속에서는 모든 것이 내린다. 내려간다. 떨어지고 추락한다
툭, 툭, 툭 악보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작은 점들 스타카토처럼.
2
좋다. 이감찬은 고해신의 저런 꼴을 보는 것이 갸륵하고 즐겁다.
유망주 출신의 소년이 이제는 물에 발 담구는 것 조차 꺼리는 우스운 꼴이 되었다.
이감찬은 한 해 전부터 고해신의 존재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 중학 시절 도내 대회에서 빼어난 외모와 실력으로 화제가 되었던 그의 영상도 스치듯 본 적 있었고, 입학 이후 복도에서 그와 스쳐 갔을 때 '쟤인가 보네, 실물이 더 나아.'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긴 속눈썹과 세련되고 화려한 이목구비는, 표정 변화가 전혀 일지 않아도 주변을 압도할 정도로 깔끔하고 단정했다. 외모 뿐이랴, 그 외에도 고해신은 잘난 구석이 다분했다. 귀하게 자란 도련님 특유의 여유는 눈치가 없는 자라도 단 번에 알아낼 수 있을 법할 정도였고, 그에서 비롯된 매사 잃을 게 없다는 듯한 태도가 뻔뻔했다. 그런 경향을 지닌 사람은 의도치 않아도 타인의 애간장을 타게 만드는데 도가 터 있는데, 그것은 자연히 이감찬으로 하여금 고해신에게 반감을 갖게 만들었고, 누구에게나 호감을 쉬이 따 내는 고해신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이감찬은 고해신이 슬럼프가 와서 좋았다. 간절한 것 하나 없는 자식이 못 하는 것까지 없으면, 특출나게 내세울 것 하나 없이 자존심만 드릉드릉한 저 자신이 초라해진다.물에 닿는 것을 두려워하는 새끼 고양이처럼, 풀장을 한참 서성거리는 고해신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에 묘한 안정이 찾아온다. 그래서 이감찬은 자주 수영장에 들렀다. 인상을 쓴 채 물을 내려보는 고해신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것 같은, 온 몸으로 자만을 표출해내는 저 남성에게도 극명한 꺼림의 대상이 있다는 것이 볼 만했다.
고해신이 두려워 하는 것이 늘어서 더욱 좋았다. 물을 보며 경멸하는 듯한 저 표정, 그것은 어쩌면 자신만이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해신은 만사 태평하니까. 타인들이 말을 걸어 와도 어찌 되도 좋다는 듯 무료하게, 생기 없는 눈으로 퉁명스레 대꾸하기를 일관하니, 그 싸늘함이 아무도 없는 수영장의 한기를 꽤 닮은 것도 같다. 누구도 찾아 오지 않는 방과후 늦은 시간의 수영장, 텅 빈 수영장은 물이 가득해도 소리 한 번 내지 않는다. 그러나 일그러진 고해신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자식도 밀랍인형이 아닌 살아 숨쉬는, 어쩌면 자신만큼이나 열등한 인간 같다.
그래서 고해신이 일년 반 만에 풀장에 몸을 들이밀었을 때, 이감찬은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언제고 주위만 기웃대던 녀석이 물과 맞닿아 파열음과도 같은 마찰음을 내는 순간,
이감찬은 고해신이 다시금 수영을 사랑하게 될까 우려했다.
수영을 사랑하는 고해신은 또 완전무결해지겠지.
속이 뒤틀리는 것과도 같은 불쾌감이었고, 혐오스러울 정도의 괴이한 감정이었다.
고해신이 못내 혐오로 가득한 표정으로 풀장을 빠져나오는 순간, 이감찬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텅 빈 풀장, 교내에서 가장 거대한 푸른 점을 닮은 고해신의 얼굴이 인정 사정없이 구겨질 때, 이감찬은 쾌락을 느낀다.
이것은 어떤 충동 같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고해신의 혐오를 독점하고 싶은, 어쩌면 늦게 온 사춘기일지도 모른다.
3
하지만 고해신이 영영 수영장에도 나타나지 않자, 이감찬은 다른 이유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욕심이 많았다. 고해신의 작은 절망들을 비밀 삼아, 혼자 특례 삼고 기뻐할 정도로 만족하지 못했다. 아예 수영이랑 손절을 친 듯 보이는 녀석은 조금의 절망도 보이지 않고, 태연하게 다시 저를 찾는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가 유유자적 살아내려는 듯했다. 자신과 전혀 관련도 없는 고해신에게 일방적으로 배알이 꼴려 그를 지켜봐 온 저는 그런 평안이란 흉내낼 수도 없는 것이라서, 다시금 이감찬은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나는 네가 필요 이상으로 멀쩡하지 않았으면 좋겠단 말이야. 이감찬은 어떻게든 그의 신경을 긁을 방법을 다시금 모색하기로 했다. 다시 자신 모르게 고해신을 우러러 보기 시작하기 전에.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더욱 직접적으로 개입해야만 했다.
수영장을 막 나서려는 고해신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한참이나 미뤄 왔던 이름을 직접 발음해 낸다.
한 음절마다 힘을 제대로 준다.
"고해신."
낮은 음성에 머리칼의 물기를 손으로 털던 고해신이 이감찬을 흘겨본다.
고해신의 눈동자에 자신이 비춰지는 것이 오랜만이다. 이 눈들은 너 따위엔 관심도 없으니까 이만 가 봐, 하고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안에 비춰지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왜."
표정은 잔잔하고, 이목구비는 날카로운데, 고해신의 목소리는 은근히 부드럽다.
이감찬은 가장 효과적으로 신경을 긁을 수 있을 법한 문장을 꺼낸다.
"너 병신이냐, 원래 잘 하던 애가 뭐가 쫄린다고 그래?"
"..."
"고해신. 배부른 생각 하지 말고, 다시 수영해."
당황한 고해신은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그래, 이 들개같이 정제되지 않은 표정. 노골적인 너의 얼굴이 좋아, 고해신.
4
이감찬의 잔소리가 시작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자, 예견한 대로 고해신은 이감찬을 신경질적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무던하던 녀석이 대뜸 걸어오는 시비가 달갑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제 앞에서 알짱거리는 등에 같은 이감찬에게, 고해신은 퉁명스럽게 대답하곤 했다.
"뭔 수영이야, 네가 나한테 그런 말 할 처진가."
"씨발 웃기잖아. 말만 나오면 벌벌 떠는 게."
세상에 두려울 것이라곤 없다는 태도로, 흠결 하나 찾을 수 없는 무뚝뚝한 얼굴로 방관하듯 띄우는 포커페이스가 난 보기 싫었다고.
그런 얼굴은 로봇 같잖아, 딱딱하게 굳어서는, 우습고도 우습다. 천하의 고해신이 물을 보며 벌벌 떨 때, 그 때에야만 고해신이 간신히 인간처럼 보인다.
반감으로 가득찬 고해신의 얼굴은 비웃어주기 딱 좋게 역겹다. 유일하게 빛이 꺼지는 순간이다.
금세 사라져 버리는 일그러진 얼굴을, 이감찬은 더 간직하고 싶다. 조금만 더, 눈썹을 늘어뜨리고 인상을 찌푸린다면,
고해신도 자신과 비슷한 격을 지닐 것 같다. 특별할 것 하나 없고, 사실은 하잘 것 없어서,
내 옆에 있어도 하나 이상할 것 같지 않다.
이감찬의 끈질김에 고해신의 어투는 날이 갈수록 뾰족하고 날카로워진다.
"왜 이래라 저래라 해. 다른 새끼도 아니고 네가 이렇게 말하는 거 우스워. 너도 수영 안 하잖아."
"나야 뭐, 해도 잘 안 되는 거고. 넌 시작도 못 하는 거고. 천지 차이 아닌가."
자신에겐 날이 갈수록 뾰족하게 대하면서, 다른 이에겐 제 언급 한번 하지 않으니 지켜보는 와중에도 부아가 치민다. 고해신의 치부에 더 긴밀히 파고들어 녀석을 자극시키고 싶다. 자극, 그래, 자극이다.
어떻게 해야 더 인간다워질래, 고해신? 이감찬의 인간다움은 더럽고 추악한 것.
고해신의 태연함이 밑천을 드러내는 순간을 기다리며, 이감찬은 포기하지 않는다. 천천히, 꾸준하게. 이것은 이감찬이 잘 하는 몇 안 되는 일.
언젠가 고해신의 바닥을 볼 수 있을 거야.
서서히 물에 빠뜨려 익사시키듯, 이감찬은 그 때만을 고대하며 매일 작은 충돌을 시도한다.
5
어느 날은 이감찬이 강수를 뒀다. 고해신을 도발한 것이다.
이감찬, 너도 수영은 안 하면서 뭐라 하지 마. 이런 말이나 하는 고해신의 유구한 레파토리가 지긋지긋해서,
이감찬은 그를 다시 교내 수영장으로 데려왔다.
나는 너와 달라.
너는 나를 잘 못 생각했어.
처음에 내가 왜 거길 다시 가야 하냐고 짜증을 내던 고해신은 이감찬의 쫄리냐는 간단한 시비에 쉽게 넘어왔고,
고해신은 스스로 자기가 유치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영장에 방문하지 않은 지는 한 달이 더 지났을까. 오랜만에 방문한 수영장 약 냄새가 생소하다고 생각하며,
묵묵히 따라 온 고해신은, 탈의실까지 따라 들어와서는 중앙의 의자에 아무렇게나 앉는다.
"해 봤자야, 이감찬. 어차피 나 보다 잘 하지도 못 하는 주제에."
긴장감 하나 없는 툼영스러운 목소리.
이감찬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래, 안다. 고해신의 화려한 지난 성적에 비하면
제 느리고 비루한 실력은 우스울 것이다. 그래서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병신아, 난 '안'하는 거지, 너처럼 못하는 게 아냐."
하지만 이런 것은 좀 각인 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날이 선 이감찬의 말에 고해신은 답하지 않는다. 다시 입을 열어야 하는 것은 이감찬이다.
"옷 벗게 고개 좀 돌려."
하지만 고해신은 실소한다.
"씨발아 뭔... 사내 새끼들끼리"
"...하"
고해신이 앉아 있는 의자에서는 이감찬이 훤히 보인다.
평소라면 이런 것 따위, 이감찬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빠짐 없이 근사한 고해신의 앞에서, 나신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빈정 상한다.
이러고 싶지 않은데. 입을 열어 버럭 외친다.
"씨발, 좀 돌리라고."
"아... 진짜 이감찬 성깔"
진지해야 하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자기 조차도 상황이 참 어색해 진땀 난다.
그보다 고해신, 분명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었나, 웃은 것 같은데.
증거는 말 끝에 달랑이며 붙어 있는 바람 새는 소리.
당황해 순식간에 캐비넷 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후회가 된다.
지금 뒤를 돌면 여전히 웃고 있을까?
이감찬은 고해신이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재수 없을 만큼 태연한 웃음도, 태평하게 활짝 웃는 웃음도, 쭈뼛거리며 바들바들 웃는 웃음도, 무엇 하나 제대로 상상할 수 없다. 연관된 얼굴을 본 적이 글쎄 한 번도 없으니까.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홱, 뒤늦게라도 고개를 돌려 보면 고해신은 이미 묵묵히 이감찬을 응시하고 있다.
이감찬은 더 이상 고해신에게 강요하지 못하고 훌훌 탈의한다.
이번에는 고개 돌리나는 말도 안 한다. 맨 살이 그대로 나타나고, 이감찬도 고해신도 고개를 돌리진 않는다.
긴장이 가득한 탈의실인데, 이감찬의 맨 등이 시려 온다. 유독 시렵다. 공기조차 차다.
6
이감찬에게 시간을 끄는 것이나, 행동을 지체하는 것 따위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수영복 하의를 착용한 뒤, 둘은 곧바로 수영장 안으로 이동했고,
이감찬은 설렁설렁 하는 척 꾸역꾸역 기억나는 준비 동작들을 다 했다. 팔을 돌리고, 어깨를 풀어주고, 발목까지 구석구석 돌려 주었다.
이제 와서야 실감이 나는 것인지 고해신은 새삼 주위를 열심히 두리번거리다가, 이감찬이 시선을 가까이 할 때면 모르는 척했다.
후, 심호흡을 한 이감찬이 수영장 안으로 몸을 던진다. 수심이 가장 깊은 쪽에 서니 발 밑으로도 1m가 넘어, 벽 쪽에 몸을 붙이고 있어야 고해신을 올려다 볼 수 있다. 사다리 옆에서 이감찬을 가만 내려다 보고 있는 저 폼 잡는 사나이 말이다.
녀석은 빤히 그런 이감찬을 바라보다가, 뭔가 생각난 듯 느리적거리며 걷기 시작한다.
성질이 급한 이감찬이지만 왠지 그것을 끝까지 기다린다.
고해신이 도달한 곳은 레일의 맞은 편, 언제나 이감찬이 고해신을 감시하던 곳이다.
뭐야,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
고해신은 쭈그리고 앉아, 이감찬에게 손짓한다. 어디 올 테면 와 보라는 듯.
차가운 물의 온도, 머리를 한 번 적셔도 익숙치 않다. 이내 제대로 몸을 담구고, 어깨를 돌리기 시작한다, 발길질을 시작한다,
이감찬의 수영은 이감찬을 닮았다.
거칠고 투박하고, 빠르지 않고 꾸준하다.
서두르지 않고 물살을 가른다. 호흡을 위해 고개가 물을 빠져 나올 때면, 마음에 조바심이 넘쳐 수경 너머로 고해신을 볼 찰나도 없다. 역시 수영은 하는 편보다 방관하는 편이 더 즐겁다. 생각한 것 만큼 후련하지도 않고. 찜찜하다.
저 잘나고 이기적이고 오만한 고해신 앞에서, 결국 관찰 대상이 되어 몸을 움직이는 것이. 원형 플라스크 위에 놓인 개구리라도 된 것 처럼.
고해신이야 뭐, 자신이 내려다 봐도 언제나 별 생각 없었겠지만.
그것이 서러웠나, 섭섭했나, 모른다, 마음이 켕기는 것이 참으로.
오래 지나지 않아 레일 맞은편에 도착한다.
푸, 하. 하고 거친 숨을 내쉬면, 자신 머리 바로 위에 고해신이 있다. 여전히 가쁜 숨을 내쉬며, 이감찬은 끌지 않고 말한다.
"후우... 봐, 고해신. 안 하는 거랬지, 못 하는 게 아니라."
이번에는 수경을 급히 벗어 고해신의 표정을 본다.
평소처럼 커다란 변동 없는 얼굴이지만, 얼굴 근육 하나하나가 제 위치를 상실한 것처럼, 미묘하다. 도무지 읽어내기가 어렵다.
"난, 너보다 나아."
언제나처럼 고해신을 자극시키기 위한 예의 대사를 건네면, 평소라면 한 마디 했을 고해신이 조용하다. 이감찬은 풀에서 빠져나온다. 헛, 팔의 힘으로 위로 올라가 우뚝 서면, 온 몸에서 물이 뚝, 뚝 떨어진다. 고해신도 일어선다. 그러면, 비슷한 눈높이에서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고해신과의 키 차이는 한 뼘도 채 나지 않는데, 고해신에게는 설명 못 할 위압감이 있다.
"이감찬."
괴로운 침묵 끝에, 고해신이 입을 연다. 풀이 죽은 건가? 그런 것 치고, 녀석의 얼굴에는 여전히 이렇다 할 동요가 없다. 자연히 온 신경이 고해신에게 곤두선 것을 느끼며, 이감찬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인다. 물방울 몇 개가 고해신의 쪽으로 튀긴다.
고해신은 신경도 쓰지 않고 가만 서 있기만 한다. 하여튼 고해신은 반응의 폭이 너무 재미가 없고 지루하다. 손을 꽉 붙잡기라도 해야 대 놓고 징그럽다며 인상을 써 줄 것인지, 고해신에 관한 오랜 호기심은 평생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아 이감찬은 조바심이 난다.
"그래, 너 잘났네."
바로 다음 순간, 고해신이 이감찬의 어깨를 툭 친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이감찬이 반 발짝 쯤 밀려난다. 황당했지만, 이감찬도 지지 않고 고해신의 어깨를 더 강하게 민다.
"칭찬할 거면 똑바로 하던가, 여긴 왜 치냐?"
살짝 비웃기까지 하자,
"꼴 보기 싫어서. 자꾸 이러는거."
고해신 역시 더 거세게 밀쳐 온다. 그러면서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다. 평소와는 다르게, 연쇄적으로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고해신이 생경해서, 이감찬은 콧웃음을 친다. 부인하고 싶지만, 분명 즐겁다. 자신의 찝찝한 수영이 다 무마될 만큼.
제게 화풀이라도 하는 건가?
아까는 괜찮았으면서 이제는 왜?
"네가 할 테면 해 보라며."
고개를 까딱이며 고해신에게 재차 도발하면,
"너 같은 새끼는 지금 해도 이겨."
"뭐래, 병신이. 물에 들어오지도 못 하는 게."
"야, 이감찬..."
"물에 들어오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게 생각나서 기분이 안 좋잖아. 그렇지? 네가 버러지인게 티 나는 것 같아서 짜증나?"
"네가 뭐 착각하나 본데, 나는 수영에 그렇게 미련 없어. 씨발 아무 상관 없다고."
쌕쌕거리던 고해신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한 발자국 앞으로 더 다가서는 고해신의 아우라에 지기 싫어서, 이감찬은 또 다시 그의 어깨를 강하게 밀친다. 어쩌라고, 씨발ㅡ 이감찬은 안다. 애초에 호기심을 가진 쪽도 바라는 쪽도 원하는 쪽도, 네가 비이성적인 감정으로 나와 같은 격으로 떨어지길 바란 것도 다 자신인 것을ㅡ 그렇지만 고해신이 간접적으로 이를 상기시키면, 지독하리만큼 화가 난다.
방금의 충돌이 꽤 거셌는지, 중심을 잃은 이감찬이 휘청거린다. 잡아 줄 생각도 못하고 이감찬이 바라보는 사이, 이감찬은 발을 헛딛은 채 수영장 안으로 떨어진다.
준비조차 안 된 채로 입수하니 제대로 몸을 움직이기가 어렵다. 물살 하나 없을 풀장이 이감찬을 수용하는 것처럼, 소량의 물이 입과 코로 진입하기 시작하고 목이 막힌다.
힘을 내 팔과 다리를 저으려 하지만, 아까의 수영은 충분한 긴장감이 만들어낸 기적과도 같았던 것인지, 도저히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수면 위로 고개를 올려야 하는데, 자꾸만 안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새끼야, 쳐도 사람이 준비 됐을 때 쳐야지.
병신, 물이 무서워?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한참을 버둥거리고 나서야, 타인의 살갗이 제 등허리에 닿는 것이 느껴진다.
꾸역꾸역 뜬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것은 수영복일 리는 없는 티셔츠, 놈의 얼굴과 퍽 잘 어울리는색의 짙은 회색, 물이 들어가 울룩불룩해지며 고해신의 맨 살결이 드러난다.
자신을 쥐어잡은 고해신은 이감찬을 벽 쪽으로 몰아 위로 끌어올린다. 가까스로 숨이 이어진다.
"..."
"..."
"파하, 하. 씨발. 고해신, 너 일부러 그랬지."
퉁명스레 고해신에게 한 마디 내뱉지만,
심각한 얼굴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고해신을 어쩐지 더 이상 공격하고 싶지가 않다.
이 자식, 건드려도 문제 없는 얼음 덩어리가 아니라 그냥 건들지 말라고 가시를 세우는 작은 고슴도치랑 다를 게 없다.
"아니야, 이감찬. 그 정도도 못 믿어?"
"고해신, 너는 믿으면 안 돼."
"그걸 믿으면 안 돼."
흠뻑 젖은 녀석의 평상복이 안쓰럽다. 풀장에서 빠져나가 녀석의 정강이를 한 대 걷어차기라도 하고 싶은데,
이감찬은 또 다시 묘한 충동에 사로잡힌다.
이 또한 어쩌면 고해신의 성취와 신경을 사로잡고 싶은 늦게 온 사춘기일지도 모른다.
"고해신, 수영 했네."
나는 네가 수영을 싫어하길 바란 게 아닌가 봐.
그냥 뭔가를 싫어해서, 나처럼 평범하길 바랐어.
내가 인간적으로 너에게 드는 호기심을 해소할 수 있게. 네 옆에 설 수 있게 말야.
"그냥... 수습한 거지, 뭔 소리야."
"들어온 게 어디야. 기왕 이렇게 된 거 더 해봐."
"넌 참..., 이상한 거에 집착해."
이감찬이 집요하게 구는 것은 결국 공통적으로 저에 관련된 것인지는 여전히 모르는 것인지, 고해신은 시선만 돌린다.
이감찬은 말 없이 퍽, 그의 어깨죽지를 친다. 수면 위에서 꼼짝 없이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야, 뭐해. 고해신의 타박이 들려오지만 다시 퍽, 그리고 퍽, 고해신을 풀 안으로 밀어넣을 때까지 녀석을 두드린다. 무게로 누르기를 시도한다. 이래 봤자 버티려 든다면 얼마든 그리 할 수 있겠지만, 웃기는 고해신. 죽어도 모양 빠지는 일은 안 하려 든다. 고해신은 순순히 풍덩, 다시 풀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수영을 좋아해라.
네가 나를 싫어하는 것보다 챙겨주는 편이 더 좋은 걸 보면, 나도 그만 심술 부릴 때가 되었나 봐.
그렇게 허우적댈 고해신을 구경할 생각에 신이 나서 다리를 쭈그려 앉으려는데,
다음 순간,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고해신이 이감찬의 두 다리를 꽈악 붙잡은 것이다.
물귀신처럼 다시 안으로 잡아당기기 시작한다. 아 씨발 뭐해, 야, 야 이 병신아. 이감찬이 언성을 높이고 발길질을 하지만 고해신은 이제 잃을 것도 없다 생각했는지 도저히 봐 주지 않는다. 꼬르륵, 물을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뱉어낼 새도 없이 이감찬은 다시 물 안으로 빠져 들어간다, 고개까지 푹 입수했다. 하지만 예견된 입수는 침착하게 물 안을 유영할 수 있게 해 주었고,
다시 구태여 눈을 떠 고해신을 바라보면 고해신은,
신기하게도 웃고 있다.
자유형을 하는 폼으로 몸을 일직선으로 만든 채, 이감찬의 얼굴 앞에서 이감찬 앞에서 웃고 있다.
평생 볼 수 없었을 것 같은 홀가분하고, 즐거워 보이는 작은 미소를 짓고 있는 고해신을 얌전히 바라보며, 이감찬은 순간 의식의 재조립을 경험한다.
내가 얘를 왜 그리 미워했더라?
미워한 적은 있었나?
차마 그 표정에서 시선을 떼지 못 하겠다.
지금 오래 봐 두지 않으면 후회할 것만 같다.
저번에 겪었던 것처럼.
잠수하는 와중, 코 주변에서 기포가 솟구쳐 올라간다.
속눈썹에도, 뺨에도, 팔에도, 잔뜩 들러붙은 물방울들의 갯수는 평생 시간을 멈춰도 제대로 세어 내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그걸 구실 삼아 잠시 그리하고 싶을 정도로 눈 앞에 보이는 고해신의 웃음은 신기한 것이다.
오른다, 오른다, 오른다.
기포도, 기분도, 그리고 -
갑자기 깨닫는다.
고해신에게 바라온 것은 단 하나.
자신이 고해신을 고려하는 것처럼 자신도 그리 신경의 범주 안에 들어가기를 염원하는 마음.
갑자기, 고해신은 팔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긴 팔이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고요히 전진하는 것을 이감찬은 몇 초간 바라보다가,
반사적으로 따라가기 시작한다.
얼마나 질주했을까?
역시 잘 나가던 놈은 다르다. 체력이 달리는 것도 있지만,
못 하는 수영을 계속 잡고 있는 것이 싫어 대충 먼저 수면 위로 올라간다.
매일 지키던 자리였지만 정말, 풀장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고해신을 응시하고 있자니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여유로이 유영하는 고해신의 인영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누차 반복하며 찬찬히 이감찬에게 가까워져 온다.
텅 빈 수영장, 빛은 고해신의 주변만을 감쌌다가 멀어졌다가 한다. 꼭 후광이라도 비춰지는 것만 같아,
이감찬은 이번에도 눈을 마음 놓고 깜빡이기가 어렵다.
또 다시, 고해신의 머리를 주변으로 기포들이 오른다.
숨 하나하나가 작은 방울을 이뤄 끝없이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른다.
올라가기 시작한다.
마침내 고해신이 짧은 숨을 뱉으면,
어느새 트랙 맞은편에서 그를 기다리던 이감찬과 시선이 마주친다
찬 물에 잔뜩 젖은 상의를 고해신이 훌렁 벗으면, 이감찬이 무의식적으로 고해신의 머리칼을 턴다.
고해신은 이감찬의 어깨 위에 젖은 제 고개를 그대로 파묻는다.
한기에도 움찔하지 않고 이감찬은 가만 우뚝 서 있는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면,
방금까지 헤엄쳤던 너머의 풀장에서는 고해신의 얼굴이 수 백개로 비춰진 채 일그러지기를 반복한다.
이제 이감찬은 더 이상 고해신의 입가를 주목할 필요가 없다.
온갖 것이 내리던 날들도 있었다.
망설이던 이감찬은 고해신이 보지 못하는 틈을 타 머뭇거리며 손을 올린다.
한참을 서성거리며 공중을 헤매던 손은, 결국 마침내 고해신의 뒷목에 닿는다.
이감찬의 체온이 전도된다. 고해신에겐 과분한 것이다.
오른다, 오른다, 맞닿은 숨이 닿아 오른다.
고해신은 알지 못한다. 그가 오늘 깨달은 것이라곤, 앞으로 자신은 더 이상 수영을,
이감찬을 싫어할 수 없을 것이란 사실 뿐이다.
이감찬은 다 알았다. 이제 이미 다 알게 되었다.